경험론 4강. 흄의 유산: 자아의 해체와 사실·당위 문제
같은 칼로 자아마저 벤다. 그리고 "이다"에서 "해야 한다"로 건너뛰는 모든 논증에 경고장을 붙인다.
풀고 시작
자아: 지각의 다발
데카르트의 부동점이었던 "나"에 흄의 검사 규칙을 적용한다. 자아 관념의 출처 인상은 무엇인가. 내면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특정 지각(더위, 소리, 감정)에 걸려 넘어질 뿐, 지각들과 별도로 존재하는 지속적 자아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결론: 자아는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이다. 마음은 지각들이 잇달아 등장하는 극장이다(단, 무대도 극장도 따로 없다. 공연이 전부다). 동일한 자아라는 믿음은 기억이 지각들을 꿰어 만든 허구적 연속성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불교의 무아(無我)와 놀랍도록 닮았고(동양철학 과목에서 재회한다), 로크의 기억 이론보다 급진적이다. 흄 자신도 부록에서 "이 문제는 내게 너무 어렵다"고 고백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여기서 다발로 흩어졌다.
사실과 당위: 건널 수 없는 틈
『인간 본성론』의 짧지만 파괴적인 단락. 도덕 체계들은 "신은 이러하다", "인간은 이러하다"라는 이다(is) 문장들로 진행하다가 슬그머니 해야 한다(ought) 문장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이행은 전혀 새로운 관계라서 설명과 정당화가 필요한데,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당위 문제(is-ought problem)다. "인간은 본래 경쟁한다, 그러므로 경쟁 사회가 옳다"(자연주의적 오류의 냄새), "진화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 같은 논증은 전부 이 틈을 무단 횡단한다. 그럼 도덕은 어디서 오는가. 흄의 답: 이성이 아니라 감정(공감)에서다. 악덕을 아무리 관찰해도 "악함"이라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되는 것은 그것을 향한 우리의 부인(disapprobation)의 감정이다. 도덕은 세계의 성질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반응이다. 이 감정주의는 메타윤리학(윤리학 과목 1강)의 출발점이 된다.
온건한 회의주의자의 생활
인과도 귀납도 자아도 해체됐다. 흄은 절망하는가. 아니다. 서재에서의 회의는 주사위 놀이와 저녁 식사 앞에서 힘을 잃는다고 그는 쓴다. 자연(습관과 본성)이 이성의 파산을 메워 준다. 그의 처방은 "완화된 회의주의"다. 독단을 꺾는 데 회의를 쓰되, 일상과 과학은 습관 위에서 계속하라. 흄 자신은 역사가로 성공했고, 죽음 앞에서도 평온해 보즈웰을 당황시켰다.
유산 정리
- 칸트를 깨웠다: "흄이 나를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 인과의 필연성을 구제하려는 시도가 『순수이성비판』이다(다음 과목).
- 논리실증주의의 성서: 흄의 포크는 검증주의로 부활한다(분석철학 과목).
- 인지과학의 예고: 마음을 습관·연합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기획은 연합주의 심리학과 현대 학습 이론의 조상이다.
- 경험론 3부작의 결산: 로크가 규칙을 만들고, 버클리가 물질에, 흄이 인과·자아·귀납에 적용했다. 경험론을 끝까지 밀면 과학의 토대마저 흔들린다는 이 결과는, 경험론의 실패가 아니라 정직성의 증명이다. 문제를 정확히 드러낸 철학이 문제를 덮은 철학보다 낫다.
인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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