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3강. 라카토슈와 파이어아벤트
한 사람은 포퍼와 쿤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다리는커녕 강둑 자체를 폭파했다.
풀고 시작
포퍼의 제자, 쿤의 문제를 풀다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 1922~1974)는 헝가리 출신으로 런던정경대에서 포퍼의 동료이자 계승자가 된 인물이다. 그가 마주한 곤경은 앞의 두 강의가 만든 것이다. 포퍼의 소박한 반증주의는 과학사와 맞지 않는다. 위대한 이론들은 모두 변칙의 바다에서 태어났고, 반증 사례에 즉시 폐기됐다면 뉴턴도 코페르니쿠스도 요람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쿤을 따르면 이론 교체가 개종의 문제가 되어 과학의 합리성이 흔들린다. 라카토슈의 목표는 명확했다. 과학사에 충실하면서도 합리적 평가 기준을 남기는 것. 그는 "과학사가 없는 과학철학은 공허하고, 과학철학이 없는 과학사는 맹목이다"라는 칸트풍의 문장으로 자신의 강령을 요약했다.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라카토슈가 제안한 평가 단위는 개별 이론이 아니라 연구 프로그램(research programme), 즉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이론들의 계열이다. 구조는 세 부분이다.
| 구성 요소 | 역할 | 뉴턴 프로그램의 예 |
|---|---|---|
| 견고한 핵(hard core) | 반증으로부터 보호되는 중심 원리 | 운동 3법칙과 만유인력 법칙 |
| 보호대(protective belt) | 반박을 대신 받아 수정되는 보조 가설들 | 행성 개수, 궤도 초기 조건, 광학 가정 |
| 발견법(heuristic) |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지킬지의 지침 | 섭동 계산으로 변칙을 처리하라 |
핵을 지키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관건은 어떻게 지키느냐다. 보호대 수정이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고 그 일부가 확인되면 프로그램은 전진적(progressive)이다. 천왕성 변칙에서 해왕성을 예측해 낸 뉴턴 프로그램이 모범이다. 반대로 수정이 이미 알려진 사실을 뒤쫓아 설명만 하면 퇴행적(degenerating)이다. 라카토슈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는 예측이 빗나갈 때마다 사후 설명을 덧대는 퇴행의 전형이었다. 이렇게 포퍼의 합리주의는 살아남되(평가 기준이 있다), 쿤의 통찰도 수용된다(반증 하나로 죽는 이론은 없고, 퇴행 프로그램을 붙드는 것도 즉시 비합리는 아니다). 남는 약점은 시간이다. 퇴행처럼 보이던 프로그램이 훗날 회생할 수 있으므로, 이 방법론은 사후 평가에 강하고 현재의 결단에는 약하다. 파이어아벤트는 바로 이 지점을 물었다. 언제 버려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는 방법론이 방법론인가.
파이어아벤트: 방법에 반대한다
파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1924~1994)는 빈 출신으로 한때 포퍼의 제자였으나 가장 급진적인 반역자가 되었다. 『방법에 반대한다』(Against Method, 1975)의 논제는 단순하다. 과학의 성공을 설명해 줄 보편적이고 초역사적인 방법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규칙을 세워도 과학사의 결정적 국면에서 그 규칙이 깨졌음을, 그리고 깨졌기 때문에 진보했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결론이 유명한 한 문장이다. "진보를 가로막지 않는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
주력 사례는 갈릴레오다. 지동설에는 당대 기준으로 강력한 반박이 있었다. 지구가 돈다면 탑에서 떨어뜨린 돌은 뒤로 처져야 하는데 수직으로 떨어진다. 갈릴레오는 이 관찰을 더 정밀한 관찰로 이긴 것이 아니라, 운동의 상대성이라는 새로운 해석 틀을 관찰 언어 자체에 심어서 반박을 무장 해제했다. 망원경 관측도 당시에는 이론이 확립되지 않은 도구의 증언이었다. 파이어아벤트가 보기에 갈릴레오는 선전, 수사, 임시방편 가설까지 동원했고, 그래서 옳았다. 포퍼식 규칙을 따랐다면 지동설은 그때 폐기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인식론적 아나키즘의 진의와 오해
"무엇이든 좋다"는 흔히 "아무렇게나 해도 다 똑같다"는 상대주의로 읽히지만, 파이어아벤트 자신은 이 문구가 자기 신조가 아니라 보편 방법론을 원하는 합리주의자가 과학사를 직시할 때 강요당하는 결론이라고 밝혔다. 그의 인식론적 아나키즘(epistemological anarchism)의 과녁은 방법의 물신화, 그리고 과학이 국가와 결합해 다른 전통을 억압하는 권위주의다. 그는 이론의 증식(proliferation)을 옹호했다. 지배 이론의 결함은 그 내부가 아니라 경쟁 이론의 시점에서만 보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대안의 공존 자체가 비판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규칙의 예외 사례가 규칙의 무용을 증명하는가(반례 몇 개로 방법 전체를 기각하는 것이야말로 소박한 반증주의 아닌가). 점성술과 대체의학까지 동등한 발언권을 주자는 주장은 구획의 필요를 너무 쉽게 버린 것 아닌가. 그럼에도 그의 도발은 과학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 질문은 4강의 실재론 논쟁으로 이어진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퇴행적 프로그램에 남아 있는 과학자에게 연구비를 계속 주어야 하는가. 라카토슈의 방법론이 사후 평가에만 강하다면, 연구비 심사라는 현재의 결단에는 무엇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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