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 4강. 현대 정의론의 확장
"무엇을 평등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바뀌자, 정의론은 소득 분배를 넘어 역량, 인정, 국경, 민주주의로 확장됐다.
풀고 시작
무엇의 평등인가: 센과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
1979년 아마르티아 센(1933~)은 「무엇의 평등인가(Equality of What?)」라는 강연에서 평등 논쟁의 판을 새로 짰다. 공리주의는 효용의 평등을, 롤스는 기본가치(primary goods)의 평등한 분배 구조를 말한다. 센은 둘 다 과녁이 빗나갔다고 본다. 효용은 적응적 선호의 문제에 걸린다. 궁핍에 길들여진 사람은 작은 것에도 만족하므로, 만족도만 보면 억압이 은폐된다. 자원은 전환(conversion)의 문제에 걸린다. 같은 소득이라도 장애, 임신, 기후, 사회적 차별에 따라 그것으로 실제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센의 제안은 평등의 지표를 역량(capability), 곧 사람이 가치 있게 여길 만한 삶의 기능들(functionings)을 실제로 성취할 수 있는 자유로 옮기자는 것이다. 원전의 요약은 이렇다. "한 사람의 이익을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진 재화도 그가 느끼는 효용도 아니라,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다." 이 접근은 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지수(HDI)로 제도화됐다.
마사 누스바움(1947~)은 센이 열어둔 물음, 곧 어떤 역량이 중요한가에 답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간 존엄 관념에 기대어 생명, 신체 건강, 감각과 상상, 실천이성, 관계(affiliation), 놀이 등 10대 핵심 역량 목록을 제시하고, 모든 정부가 시민 각자에게 보장해야 할 최저선(threshold)으로 삼자고 주장한다. 센은 목록의 확정을 민주적 토의에 맡겨야 한다며 목록화를 거부했고, 이 차이는 접근 내부의 살아 있는 논쟁이다. 외부 반론도 있다. 포기(Pogge)와 롤스주의자들은 역량 지표가 개인 간 비교를 위해 결국 자의적 가치 서열을 전제하며, 기본가치가 다원주의에 더 중립적이라고 응수한다.
왈저: 다원적 정의와 영역의 분리
마이클 왈저(1935~)의 『정의의 영역들』(1983)은 다른 축의 확장이다. 단일한 분배 원칙(차등 원칙이든 소유권리든)을 모든 재화에 적용하는 것이 오류의 근원이다. 재화의 의미는 공동체의 공유된 이해에 따라 다르고, 재화가 다르면 분배 기준도 달라야 한다. 의료는 필요에 따라, 공직은 자격에 따라, 시장 재화는 자유 교환에 따라, 명예는 공적에 따라 분배된다. 정의는 각 영역(sphere)이 자기 기준을 지키는 것이고, 부정의의 전형은 한 영역의 강자가 그 우위를 다른 영역으로 밀고 들어가는 지배(dominance)다. 돈으로 공직과 판결과 사랑을 사는 것이 그 예다. 그래서 왈저의 이상은 모든 재화를 똑같이 나누는 단순 평등이 아니라, 영역 간 침범을 막는 복합 평등(complex equality)이다. 돈의 영역에서 진 사람이 정치와 명예의 영역에서는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공유된 이해에서 기준을 끌어내는 이 방법은 3강의 공동체주의와 친족이지만, 바로 그 지점이 급소이기도 하다. 카스트제 사회의 공유된 이해는 카스트 분배를 정당화하는가. 왈저는 내재적 비판(사회의 이상과 실천의 괴리를 드러내기)으로 답하지만, 상대주의 혐의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분배를 넘어: 인정의 정치
1990년대에 정의론의 축이 하나 더 늘었다. 문제는 몫의 크기만이 아니라 무시(disrespect)라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1949~)는 『인정투쟁』(1992)에서 헤겔을 이어받아, 온전한 자아는 사랑(자신감), 권리(자존감), 사회적 연대(자부심)라는 세 형태의 인정(recognition)을 통해서만 형성되며, 사회적 투쟁의 문법은 이익 다툼이 아니라 무시당한 정체성의 인정 요구라고 논증했다. 낸시 프레이저(1947~)는 인정으로의 전면 전환에 제동을 건다. 문화적 무시와 경제적 불평등은 서로 환원되지 않는 두 축이므로, 정의는 재분배와 인정의 이원적(나중에는 대표를 더한 삼차원) 문제로 다뤄야 한다. 인정만 말하면 분배 투쟁이 실종되고, 분배만 말하면 정체성 부정의가 실종된다.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논쟁(『분배냐 인정이냐』, 2003)은 현대 비판이론의 표준 논쟁으로 남아 있다.
국경의 정의와 민주주의: 두 개의 미해결 전선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논쟁은 정의의 적용 범위를 묻는다. 롤스는 『만민법』(1999)에서 차등 원칙을 국내에 한정하고 국제적으로는 질서 있는 만민 간의 원조 의무만 인정했다. 제자 포기는 스승을 넘어선다. 국제 질서(무역, 차관, 자원 특권 제도)가 세계 빈곤을 함께 만들어내므로 부유국은 소극적 의무 차원에서도 지구적 정의에 책임이 있다. 피터 싱어는 공리주의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할 의무가 거리에 따라 소멸하지 않는다면, 원조는 자선이 아니라 의무다. 반대편에서 데이비드 밀러 등은 정의의 두터운 의무가 공유된 제도와 국민적 연대 안에서만 성립한다고 응수한다. 이 논쟁은 이민, 기후 부담 배분, 백신 분배 같은 현안의 철학적 하부구조다.
마지막 조감은 민주주의 이론이다. 정의로운 원칙을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투표 집계 중심의 민주주의관에 맞서, 하버마스와 후기 롤스 이후의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는 정당성의 원천을 표의 수가 아니라 공적 이유의 교환에 둔다. 강제 없는 토의에서 더 나은 논증의 힘만이 지배할 때, 그 결정은 패자도 승복할 이유를 가진다. 센이 역량 목록의 확정을 민주적 토의에 맡긴 것, 프레이저가 대표(representation)를 정의의 3차원으로 추가한 것 모두 이 지점에서 만난다. 분배, 역량, 인정, 국경의 물음은 결국 "누가 결정의 자리에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수렴한다. 서양 정의론이 여기까지 온 지금, 다음 과목에서는 전혀 다른 출발점, 곧 관계와 수양에서 시작하는 동양의 정치적 사유를 만난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한국 사회에서 돈의 영역이 침범하고 있는 다른 영역은 어디인가. 그 경계는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
- 국경은 정의의 범위를 끊는 도덕적 경계인가, 아니면 우연한 행정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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