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5강. 양상과 가능세계
"그럴 수도 있었다"는 말이 참이 되려면,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가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가.
풀고 시작
필연과 가능이라는 골칫거리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다"는 참이다. 그런데 "마시지 않을 수도 있었다"도 참으로 보인다. 이 양상(modality) 개념, 곧 필연과 가능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참·거짓은 세계를 보면 되지만, "그럴 수도 있었음"은 세계 어디를 보아야 확인되는가. 콰인은 양상 논리 자체를 의심했다. 돌파구는 라이프니츠(합리론 3강)의 부활이었다. 신이 무한한 가능세계 중 최선의 세계를 골랐다는 그의 그림에서 신학을 걷어내면 강력한 의미론이 남는다. 필연적 참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 가능한 참은 적어도 한 가능세계에서 참. 1960년대 크립키 등이 이 발상으로 양상 논리의 모델 이론을 완성하면서, "가능세계"는 현대 철학의 공용어가 됐다. 남은 질문이 이 강의 주제다. 그 세계들은 대체 무엇인가.
크립키: 이름은 고정 지시어다
크립키(Saul Kripke)의 『이름과 필연』(1972년 강연, 1980년 출간)은 이 도구로 언어와 형이상학을 함께 뒤집었다. 러셀 이래의 통설은 이름이 기술구의 축약이라는 것이었다(1강의 기술 이론). 크립키는 반례를 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참이다. 이름이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의 축약이라면 이 문장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이상한 말이 된다. 결론: 이름은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크립키는 가능세계에 대한 오해도 정리한다. "가능세계는 강력한 망원경으로 발견하는 먼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다." 이 분석에서 놀라운 귀결이 나온다. 샛별과 저녁별이 같은 천체임은 관측으로 알아낸 후험적 사실이지만, 두 이름이 모두 고정 지시어이므로 그 동일성은 필연적이다. 필연적 후험 진리("물은 H2O다"도 같은 부류)의 발견은, 필연은 선험과 같다고 여겨 온 칸트 이래의 등식(칸트 1강)을 끊어 냈다. 형이상학적 양상과 인식론적 지위는 별개의 축이다.
루이스의 도박: 가능세계는 전부 실재한다
의미론이 성공할수록 존재론 청구서가 날아온다. 1강의 기준대로라면 우리는 가능세계에 양화하고 있으니 그 존재에 개입한 것 아닌가. 루이스(David Lewis)는 정면 돌파를 택한다. 양상 실재론(modal realism)에 따르면 가능세계들은 우리 우주와 똑같이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우주들이며, 서로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을 뿐이다. "현실적"(actual)이라는 말은 "여기"처럼 화자의 세계를 가리키는 지표사에 불과하다(4강의 "지금" 분석과 같은 수법이다). 루이스의 논거는 유용성이다. 양상, 반사실 조건문, 속성(2강)까지 한꺼번에 분석해 주는 이 이론의 이론적 이득이 존재론적 비용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반응은 유명한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incredulous stare)로 요약된다. 루이스 자신이 이 눈초리가 가장 흔한 반론이며 논증은 아니라고 응수했다. 대안은 현실주의(actualism)다. 플란팅가 등은 가능세계를 구체적 우주가 아니라 현실 세계 안의 추상적 존재자(최대로 일관된 사태나 명제 집합)로 읽는다. 루이스는 이런 대용물(ersatz) 세계가 결국 분석해야 할 양상 개념을 몰래 전제한다고 반격했다. 공짜 점심이 없다는 2강의 교훈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반사실 조건문: 가까운 세계로 가라
가능세계의 대표 응용이 반사실 조건문(counterfactual)이다. "성냥을 그었더라면 불이 붙었을 것이다"는 실제로 긋지 않았어도 참일 수 있다. 스톨네이커와 루이스의 의미론은 이렇게 분석한다. 전건이 참인 가능세계들 중 현실 세계와 가장 유사한 세계에서 후건이 참이면, 그 반사실 조건문은 참이다. 성냥을 그은 세계 중 우리 세계와 가장 가까운 세계(산소도 있고 성냥도 말라 있는 세계)에서 불이 붙으므로 참이다. 유사성 비교의 기준이 모호하고 결과를 미리 알고 조정된다는 반론(파인의 닉슨 반례가 유명하다)이 있지만, 이 분석은 인과(경험론 3강의 흄이 이미 반사실적 정의를 스쳐 갔다), 법칙, 성향 분석의 표준 도구가 됐다. 형이상학 과목은 여기까지다. "무엇이 있는가"에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까지 왔으니, 다음 과목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당신과 거의 똑같지만 다른 선택을 한 다른 세계의 상대역(counterpart)이 실재한다면, "나는 달리 할 수 있었다"는 말은 위로인가 무의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