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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 5강.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낱말의 의미를 알고 싶으면 머릿속 그림을 찾지 말고 그 낱말이 삶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보라. 논고를 쓴 사람이 논고의 그림을 스스로 부수었다.

풀고 시작

문제 1. 철학적 탐구에서 "게임"이라는 낱말이 보여주는 것은?
💡 보드게임, 카드게임, 공놀이, 혼자 하는 인내심 게임을 다 관통하는 단일한 공통 속성은 없고, 가족 구성원의 닮음처럼 부분적 유사성들이 겹칠 뿐이다. 그런데도 낱말은 멀쩡히 작동한다. 본질 없이도 의미가 성립한다는 것이 가족 유사성 논점이다.

돌아온 비트겐슈타인

논고로 철학을 끝냈다고 믿고 떠났던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수학자 브라우어의 강연, 경제학자 스라파와의 대화(스라파가 나폴리식 손끝 제스처를 해 보이며 "이것의 논리적 형식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속에서, 언어가 하나의 고정된 논리적 그림이라는 논고의 전제가 흔들렸다. 사후 1953년 출간된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는 자신의 옛 책을 첫 표적으로 삼는다.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 곧 모든 낱말은 대상의 이름이고 의미는 그 대상이라는 그림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그 그림은 틀렸다기보다 언어의 한 귀퉁이만 본 것이다.

언어게임과 가족 유사성

건축가가 "석판!"이라고 외치면 조수가 석판을 가져오는 원시 언어를 보라. 여기서 낱말은 대상의 그림이 아니라 활동 속의 수(move)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그것이 짜여 들어간 활동의 전체를 언어게임(Sprachspiel)이라 부른다. 명령하기, 보고하기, 농담하기, 감사하기, 기도하기. 언어게임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하며, 새로 생기고 사라진다. 언어는 논리적 수정체가 아니라 오래된 도시다. 좁은 골목과 광장, 그 둘레의 새 교외 지역이 함께 있는.

그럼 이 다양한 게임들을 "언어"로 묶는 공통 본질은 무엇인가. 없다는 것이 답이다. 게임들을 보라, 생각하지 말고 보라. 보이는 것은 단일 본질이 아니라 겹치고 교차하는 유사성들의 그물이고, 그는 이를 가족 유사성(Familienähnlichkeit)이라 부른다. 그리고 탐구 43절의 유명한 정식이 나온다.

낱말의 의미란, 그 낱말의 쓰임이 문제되는 대부분의 경우에, 언어에서의 그 사용이다.

의미는 사용이다. 의미를 알려면 지시체(1강)나 검증 방법(4강)이 아니라, 그 낱말이 삶의 형식(Lebensform) 속에서 하는 일을 보라는 것이다.

규칙 따르기 역설

탐구의 가장 깊은 골짜기는 규칙 따르기 논의다. 201절의 역설은 이렇다. 어떤 행위 방식도 하나의 규칙과 일치하도록 해석될 수 있다면, 규칙은 어떤 행위 방식도 결정할 수 없다. "1000 다음에 2를 더하라"는 규칙을 배운 학생이 1000 이후 1004, 1008로 나아가며 "같은 방식으로 계속했다"고 우긴다면, 규칙의 어떤 부분이 그가 틀렸음을 못박는가. 규칙의 해석을 더 제시해도, 그 해석 역시 다시 비틀어 해석될 수 있다. 해석의 사다리는 바닥에 닿지 않는다.

크립키(Saul Kripke)는 1982년 『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에서 이를 급진적 회의주의로 재구성했다(이 해석의 비트겐슈타인을 흔히 크립켄슈타인이라 부른다). 내가 지금까지 "더하기"로 계산한 유한한 사례들은, 더하기가 아니라 겹하기(quus, 일정 수 이하에서는 더하기와 같고 그 너머에서는 5를 내놓는 규칙)를 따라온 것과도 모두 일치한다. 나의 과거 심리와 행동 어디에도 내가 겹하기가 아니라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사실은 없다. 크립키가 읽어낸 비트겐슈타인의 답은 회의적 해결이다. 의미 사실은 없지만, 공동체의 일치된 실천이 옳고 그름의 잣대 노릇을 한다. 규칙 따르기는 해석이 아니라 훈련으로 몸에 밴 실천(Praxis)이다. 다만 이 독해 자체가 논쟁적이다. 맥도웰(John McDowell)과 베이커-해커(Baker and Hacker)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주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규칙을 해석 사이에 떠 있는 것으로 보는 그림 자체를 치료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사적 언어 논증: 상자 속 딱정벌레

규칙이 공적 실천이라면, 원리상 나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곧 나의 사적 감각을 가리키는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는 가능한가. 데카르트 이래 근대 인식론은 내면의 확실성에서 출발했다(근대철학 과목).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은 그 출발점을 겨눈다. 내가 어떤 감각에 "E"라는 이름을 붙이고 일기에 적는다 하자. 다음에 "E"를 옳게 적용했는지 무엇으로 판별하는가. 기억뿐이다. 그러나 기준의 자리에 기억밖에 없다면 "옳게 보이는 것"과 "옳은 것"의 구별이 무너진다. 오늘 산 신문이 맞는지 같은 신문을 한 부 더 사서 확인하는 격이다. 293절의 비유가 유명하다. 모두가 상자를 하나씩 갖고 있고 그 안의 것을 "딱정벌레"라 부르는데, 누구도 남의 상자를 볼 수 없다면, 상자 속 내용물은 각자 다르든 비어 있든 언어게임에서 아무 역할이 없다. 감각어의 의미는 내면의 전시물이 아니라 공적 사용에서 온다.

전기와 후기의 관계를 표로 정리하면 이렇다. 다만 단절만큼 연속도 있다. 철학은 이론 구축이 아니라 활동(전기에서는 한계 긋기, 후기에서는 파리통에서 파리를 꺼내 주는 치료)이라는 자기 이해는 평생 유지되었다.

구분 전기 (논고) 후기 (탐구)
의미 사태의 그림 언어게임 속 사용
언어 단일한 논리적 본질 가족 유사성의 그물
이상 완전한 논리적 명료성 일상 언어는 있는 그대로 정상
철학 말의 한계 긋기 문법적 착각의 치료

인출 문제

문제 1. "의미는 사용이다"라는 정식이 대체하려는 의미관은?
💡 탐구의 첫 표적은 아우구스티누스적 그림, 곧 지시 대상이 곧 의미라는 이름표 모델이다. 사용 의미론은 낱말이 삶의 형식 속 활동에서 하는 역할로 의미를 설명한다. 공동체 실천은 사용 의미론의 일부이지 대체 대상이 아니다.
문제 1. 크립키의 겹하기(quus) 사고실험이 보이려는 것은?
💡 유한한 과거 사례는 더하기 해석과 겹하기 해석 모두와 일치한다. 의미를 확정하는 사실이 없다는 이 회의적 역설에 대해,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은 공동체의 실천으로 잣대를 대신하는 회의적 해결을 내놓는다. 수학의 모순이나 능력 상한은 논점이 아니다.
문제 1. 딱정벌레 상자 비유의 결론은?
💡 누구도 남의 상자를 볼 수 없다면 상자 속 내용물은 낱말의 공적 사용에 기여할 수 없고, 각자 다르든 비어 있든 게임은 똑같이 굴러간다. 감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근거를 내면 지시에서 공적 실천으로 옮기는 논증이다.
문제 1. 전기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공유하는 연속점은?
💡 논고는 철학을 명제 체계가 아니라 명료화 활동으로 규정했고, 탐구는 철학을 문법적 착각의 치료로 본다. 단일 본질론은 전기만의 입장이고 후기가 버린 것이며, 검증 원리는 비엔나 서클의 것이다. 일상 언어 개혁론은 후기가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식으로 틀릴 수는 없는가. 실천의 일치가 옳음의 잣대라면 "모두가 틀렸다"는 문장은 어떤 경우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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