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세미나 1강. 현대철학의 지형
20세기 후반의 철학은 세 질문에 새 답을 단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자가 누구이고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다시 물었다.
풀고 시작
전선이 이동했다
철학입문 1강에서 우리는 세 질문으로 출발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88강을 지나 도착한 20세기 후반의 지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질문들에 대한 새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다. 어떤 사조는 질문하는 주체를 심문했고(포스트구조주의), 어떤 사조는 질문의 심판관 노릇을 하던 철학의 특권을 반납했으며(신실용주의), 어떤 사조는 답의 증거로 쓰이던 직관을 실험대에 올렸고(실험철학), 어떤 사조는 질문을 병원과 서버실과 빙하 앞으로 끌고 갔다(응용 전환). 이번 강은 이 다섯 갈래를 조감한다.
포스트구조주의: 아는 주체를 심문하다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광기, 감옥, 병원, 성을 연구했다. 철학자답지 않은 목록처럼 보이지만 겨냥은 정확히 첫째 질문이다. 『감시와 처벌』(1975)의 널리 알려진 구절은 이렇다.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 권력과 지식은 서로를 직접 함축한다." 권력/지식(pouvoir-savoir) 논제에 따르면 권력은 진리를 억압하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앎(정신의학, 범죄학, 통계)을 통해 작동하는 생산적인 힘이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는 이제 "이 앎은 누구를 분류하고 어떻게 통치하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되지 않는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déconstruction)는 서양 형이상학이 기대온 이항대립(말/글, 현전/부재, 이성/감정)에서 한쪽이 특권을 누려온 구조를 텍스트 내부의 긴장으로 흔드는 작업이다. 물론 반론도 격렬했다. 설과 하버마스는 해체가 논증의 명료성을 포기한 상대주의라고 비판했고, 이 논쟁 자체가 다음 절의 분석/대륙 구분 문제로 이어진다.
거울을 내려놓다: 로티와 실험철학
로티(Richard Rorty, 1931~2007)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1979)에서 데카르트 이후 인식론 전체가 하나의 은유, 곧 정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그림 위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표상이 세계와 일치하는지 검사하는 심판관 자리를 철학이 자임해 왔다는 것이다. 그 거울을 내려놓으면 진리 대응설의 자리에 듀이와 제임스의 실용주의, 곧 탐구를 계속하게 하는 대화와 연대가 들어선다. 첫째 질문의 심판관을 해고한 셈이다. 퍼트넘은 이것이 세련된 상대주의일 뿐이라고 맞섰다.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은 2000년대에 다른 방향에서 같은 심판관을 공격했다. 철학 논증의 증거로 쓰이던 직관을 설문과 실험으로 검사한 것이다. 와인버그, 니콜스, 스티치(2001)는 인식론 1강의 게티어 사례에 대한 직관이 문화권에 따라 갈린다고 보고했고, 노브(2003)는 부수효과의 의도 귀속이 결과의 좋고 나쁨에 따라 비대칭이라는 노브 효과를 발견했다. 불타는 안락의자가 이 운동의 상징이 됐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전문가의 훈련된 직관은 다르다는 방어가 있고, 초기 실험 일부는 재현에 실패했다.
철학이 병원과 서버실로 간다: 응용 전환
1970년대부터 둘째 질문이 현장으로 내려갔다. 톰슨의 바이올리니스트 논변(1971)과 싱어의 『동물 해방』(1975)이 생명윤리를,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1979)가 기술 시대의 미래 세대 윤리를, 네스의 심층 생태학(1973)이 환경철학을 열었다. 오늘의 AI 윤리와 알고리즘 편향 논쟁은 이 계보의 최신 정거장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원리의 정당화 문제에서 제도와 기술을 설계하는 문제로 확장됐다. 윤리학 과목에서 배운 의무론, 공리주의, 덕 윤리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이 현장들의 공용 도구함이 됐다.
금 가는 벽: 분석과 대륙
프레게, 러셀의 후예와 후설, 하이데거의 후예로 갈라졌던 두 전통의 벽은 20세기 후반부터 침식됐다. 로티는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실용주의자로 읽어 벽을 넘나들었고, 크립키 이후 분석철학 안에서 양상과 본질 같은 형이상학의 옛 주제가 부활했으며, 응용윤리와 정치철학과 여성주의 철학에서는 두 전통이 같은 문제를 놓고 합류했다. 다만 논문의 문체와 논증 규범의 차이는 여전하다는 지적도 옳다. 남은 것은 지리적 구분이 아니라 스타일의 스펙트럼이다.
| 사조 | 대표자 | 바꾼 질문 | 어떻게 바꿨는가 |
|---|---|---|---|
| 포스트구조주의 | 푸코, 데리다 | 알 수 있는가 | 앎을 권력과 맥락의 산물로 재기술했다 |
| 신실용주의 | 로티 | 알 수 있는가 | 진리의 심판관 역할을 대화와 연대로 대체했다 |
| 실험철학 | 노브, 스티치 | 알 수 있는가 | 증거였던 직관을 실험 대상으로 돌렸다 |
| 응용 전환 | 싱어, 요나스, 네스 | 해야 하는가 | 원리 정당화를 제도, 기술 설계 문제로 확장했다 |
| 구분의 침식 | 로티, 크립키 이후 | 셋 모두 | 질문을 나눠 갖던 두 진영의 경계를 흐렸다 |
셋째 질문, 곧 희망의 질문은 어디로 갔는가. 종교철학의 자리를 일부 이어받은 것이 삶의 의미에 대한 논의와 환경, 미래 세대 윤리다. 이 지도를 들고 다음 강에서 88강 전체를 다시 꿰어 본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실험철학이 직관의 문화차를 보여준다면, 이 커리큘럼에서 우리가 풀어온 사고실험들의 증거 능력은 얼마나 남는가.
- 푸코의 권력/지식 논제를 푸코 자신의 저작에 적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의 앎은 어떤 권력과 함께 작동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