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 1강. 후설: 사태 자체로
세계가 존재한다는 당연한 믿음을 괄호에 넣는 순간, 의식이라는 무한한 탐구 영역이 열린다.
풀고 시작
심리학주의와의 결별, 그리고 구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수학자로 출발했다. 첫 저작 『산술의 철학』(1891)은 수 개념을 심리 작용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프레게(분석철학 1강에서 만난 그 프레게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논리 법칙을 심리 법칙으로 환원하면 논리의 필연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후설은 이 비판을 정면으로 수용했고, 『논리 연구』(1900~1901)에서 심리학주의(psychologism)를 스스로 해체했다. 여기서 현상학의 구호가 나온다. 이론과 사변을 앞세우지 말고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돌아가라. 경험에 실제로 주어지는 것을, 주어지는 그대로 기술하라는 요구다.
지향성: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다
현상학의 첫째 발견은 스승 브렌타노에게 물려받아 다듬은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이념들 I』(1913)의 정식화를 따르면 이렇다.
"모든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다."
지각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한 지각이고, 판단은 무언가에 대한 판단이며, 사랑과 공포도 대상을 향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귀결은 크다. 의식은 내용물이 담기는 상자가 아니라 대상을 향해 뻗어 있는 관계다. 그렇다면 "관념이라는 내부 표상이 외부 사물과 일치하는가"라는 근대 인식론의 설정 자체가 잘못 그려진 그림이다. 의식과 세계는 처음부터 맞물려 있고, 철학의 과제는 그 맞물림의 구조(작용의 노에시스와 대상적 의미의 노에마)를 기술하는 일이 된다.
에포케와 현상학적 환원
우리는 평소 자연적 태도(natural attitude)로 산다. 세계가 저기 그냥 있다는 믿음을 공기처럼 전제하고, 그 위에서 일하고 계산하고 과학도 한다. 후설은 이 전제가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철학은 그것을 검토 없이 쓸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판단중지(에포케, epoché)로 세계 존재에 대한 믿음을 괄호에 넣고, 시선을 대상에서 대상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으로 돌린다. 이 시선 전환이 현상학적 환원이다. 환원 후에 남는 것은 빈손이 아니라, 지향적 체험의 무한한 장이다. 사과 하나도 음영(Abschattung)으로만 주어진다. 앞면만 보이는데도 우리는 뒷면을 함께 "지평"으로 의식한다. 이런 구조가 기술의 대상이다. 내적 시간의식 분석에서 후설은 현재 인상에 파지(방금 지나간 것의 붙듦)와 예지(막 올 것의 기다림)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였는데, 이는 중세 1강에서 본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기대로 현재 안에 있다)을 방법적으로 정밀화한 계승이다.
위기와 생활세계
후기의 후설은 방향을 넓힌다. 유작이 된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1936)의 진단은 이렇다. 갈릴레이 이래 수학적 자연과학은 세계를 이념의 옷으로 덮어 씌웠고, 사람들은 그 옷을 세계 자체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과학적 이념화가 의미를 길어 오는 원천은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선과학적 세계, 곧 생활세계(Lebenswelt)다. 과학이 이 뿌리를 잊을 때 학문은 삶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위기"에 빠진다. 유대인이었던 후설이 나치 치하에서 교수 자격을 박탈당한 채 이 글을 썼다는 사정이 진단의 무게를 더한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첫째, 에포케의 수행 가능성 문제다.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세계에 이미 던져져 있고 얽혀 있는 한, 세계 믿음을 완전히 괄호 치는 일은 원리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둘째, 유아론 혐의다. 환원 후의 초월론적 의식에서 출발하면 타인의 의식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 제5성찰의 상호주관성 이론으로 답하려 했지만, 성공 여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이 두 갈래 비판이 각각 2강의 하이데거와 4강의 메를로퐁티로 이어진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스마트폰 지도가 안내하는 길과 몸에 익은 동네 길의 차이는, 이념화된 세계와 생활세계의 차이를 얼마나 잘 보여 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