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1강. 존재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은 한 단어다: 모든 것. 진짜 싸움은 그 "모든 것"에 무엇을 세느냐에서 시작된다.
풀고 시작
물음의 문법부터 다시 쓰다
형이상학의 첫 분과인 존재론(ontology)은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콰인(W. V. O. Quine, 1908~2000)은 1948년 논문 「있는 것에 관하여」(On What There Is)를 이렇게 연다. "이 물음은 한 단어로 답할 수 있다. 모든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 답을 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농담 반이다. 답이 자명하다는 말은, 존재론의 실질적 논쟁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모든 것'의 목록에 올릴 것인가(수, 보편자, 가능세계, 허구적 대상)를 두고 벌어진다는 뜻이다. 이 강은 그 논쟁의 문법을 정리한다. 인식론 5강까지가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였다면, 이제 질문이 "무엇이 있는가"로 바뀐다.
플라톤의 수염: 없는 것을 말하는 역설
부정 존재 진술부터 문제다. "페가수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참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 문장이 무언가에 관한 문장이려면 페가수스가 어떤 의미로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가. 콰인은 이 오래된 수수께끼를 플라톤의 수염(Plato's beard)이라 불렀다. 이 엉킨 교설은 "오컴의 면도날을 무디게 만들 만큼 질기다"는 것이다. 마이농(Meinong)처럼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 있는" 대상을 인정하는 길도 있으나, 콰인은 러셀의 한정 기술 이론을 확장해 수염을 깎는다. "페가수스"라는 이름을 "페가수스인 것"이라는 기술구로 바꾸면, 문장은 "페가수스인 것이 하나도 없다"가 되고, 페가수스라는 대상을 전제하지 않고도 참이 된다. 이름을 쓴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 존재도 약속되지 않는다.
존재론적 개입: 양화가 고백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 약속을 드러내는가. 콰인의 유명한 표어가 답한다. "있다는 것은 속박 변항의 값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을 술어논리(논리학 2강)로 정식화했을 때, 그 이론의 문장들이 참이 되기 위해 양화사 "어떤 x가 있다"의 x가 값으로 취해야 하는 대상들, 딱 그것들이 그 이론의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이다. 예컨대 수학이 "2보다 큰 소수가 있다"를 참으로 요구한다면, 수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수의 존재에, 곧 수의 존재에 개입한 것이다. 이 기준의 힘은 존재론 논쟁을 흐릿한 직관 싸움에서 이론 선택의 문제로 바꾼 데 있다. 어떤 존재자를 피하고 싶으면, 그것에 양화하지 않고도 같은 일을 하는 이론을 만들어 보라. 못 만들면 개입을 인정하라.
카르납의 반격: 그 질문은 사이비다
여기에 정면 반론이 있다. 카르납(Rudolf Carnap)은 1950년 「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에서 존재 물음을 둘로 가른다. 수의 틀(framework)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이 "3보다 큰 소수가 있는가"를 묻는 내부 물음은 틀의 규칙으로 답이 나오는 사소한 물음이다. 반면 "수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외부 물음은 참·거짓을 따질 이론적 물음이 아니라, 그 틀을 채택할지 말지를 따지는 실용적 결정의 문제일 뿐이다. 즉 전통 존재론은 사이비 문제라는 것이다. 콰인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 자체를 거부한다. 그에게 분석과 종합의 구분이 무너지듯(경험론 4강의 후속 논쟁), 틀 안 물음과 틀 선택도 연속적이며, 존재론은 과학 이론 선택과 같은 저울(단순성, 설명력)로 심사받는 진짜 물음이다. 이 메타존재론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오늘날 "존재 물음은 얕은 언어 문제인가, 깊은 세계 문제인가"라는 형태로 계속된다. 다음 강에서 이 도구들을 첫 실전, 보편자 문제에 적용한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존재한다"는 말은 의자, 수, 셜록 홈즈에 대해 같은 의미로 쓰이는가, 아니면 여러 의미가 있는가.
- 존재론 논쟁이 언어(틀) 선택의 문제로 환원된다면, 형이상학은 무엇을 잃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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